top of page

[Statement]

 

이제는 우리의 곁을 떠난 장국영(1956~2003)이 영화배우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는 1986년 이후부터 1990년대 후반이다. 홍콩영화의 전성기와 쇠퇴기에 걸쳐 있는 장국영의 삶은 홍콩 영화와 궤를 나란히 한다. 그가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주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혼란을 겪거나 정착하지 못하는 인물이었고 이는 그의 실제 삶과 어딘가 비슷해 보인다. (그는 당시의 많은 홍콩 배우들처럼 1997년 반환 직전 캐나다로 국적을 바꾸었다.) 『RE:CURRENT』의 두 번째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프로젝트인 <미도불원>에서 우리는 장국영과 (반환 전후 시기의) 홍콩영화를 나란히 살펴보았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 안에서의 장국영, 그리고 연기에 자연스레 투영될 수 밖에 없는 그의 실제 모습과 그가 살았던 시대 - 홍콩 반환까지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홍콩 영화의 흥망성쇠 - 를 나란히 두고 살펴볼 것이다. 그의 삶과 홍콩 영화와의 상관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의 내밀한 목소리를 들을 방법을 고민하던 중, 영화 안의 그를 감싸고 있는 불안함과 부유하는 느낌이 그의 표정과 목소리 등을 통해 전달되는 장면들을 모아보았다.

[RE:CURRENT AudioVisual Film Critique Project #.2]

미도불원

 

 

 

 

 

 

 

 

 

 

 

 

 

 

 

 

 

 

 

 

 

 

 

 

 

 

 

 

 

 

[Background]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영화 속에 담기는 요소들은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떤 영화들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상황이나  문화등을 보여주는 창이 되기도 한다. 내셔널 시네마(national cinema)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영화들은 특정한 도시나 국가의 문화적 요소는 물론 재난, 정치적 상황, 역사적 기록 등 다양한 정보들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RE:CURRENT』는 이러한 영화들 가운데 아시아 지역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영화들을 아카이빙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해보고자 한다.

 

한국, 일본, 중국은 동아시아 국가에 속하며 매년 이 세 국가에서 제작되는 영화의 수는 매우 많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그들만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방식으로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전 세계 국제영화제 위계 내에선 아직 차상위 계층에 속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나 홍콩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계에서 중요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으며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도 여러 영화제들이 열리고 있다. '아시아 영화의 호황'이라는 말이 '주목할 만한 신인'만큼이나 식상한 표현이 되어 버린 가운데, 아시아영화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비평적으로 검토하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바다. 이에  『RE:CURRENT』는 오디오비주얼 크리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997년 7월 1일 중국 반환 전후의  홍콩영화를 비교하여 볼 수 있는 영상을 제작해 보았다.

 

1997년 영국으로부터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홍콩의 최고통치권자는 간선제로 임명된 행정장관이었다. 2017년부터는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선출하기로 했으나, 중국이 임명한 친중국 인사로 구성된 약 800여명의 후보추천위원회에 의해 투표가 진행되기 때문에 여전히 중국 중앙정부의 의도대로 행정장관이 선출되는 시스템이다. 이에 홍콩의 대학생, 교수, 중고등학생들은 직선제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섰다. 시위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표방하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기존 시위대와 친중 정부의 대립구도에서 '친중 시위대'가 등장함에 따라 판국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이들 '친중 시위대'는 홍콩 정부가 매수한 중국 삼합회 및 폭력집단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실제로 그들의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인해 상당수의 인원이 피해를 입었다. 한편 시위대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현재 홍콩의 정치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홍콩을 벗어나려는 시민들이 늘고 있어, 홍콩의 ‘중국화’가 가속화되는 것으로 조사된다. 최근 들어 해외로의 이민 문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홍콩으로 들어오는 중국인들의 수 또한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홍콩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통해 현 시점을 재조명하는 일의 필요성을 느낀다. 

 

“반환식이 열린 컨벤션센터 앞에서 빗속에 펼쳐진 불꽃놀이”

 

“1842년 홍콩섬을 떼어주게 된 불평등조약의 기점인 난징조약을 맺은 바로 그 현장인 난징의 징하이사에서는 국치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이번에 세운 3.5톤의 ‘경고종(警告鍾)’을 각계 인사가 155년만의 반환을 기려 155번 타종했다.”

 

몇 세대가 뒤바뀌었을 긴 시간을 뛰어넘어 홍콩과 중국은 하나로 묶였다. 물론 완벽한 의미에서 하나의 주권국가는 아니었다. 한 국가 안에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공존시킨다는 ‘일국양제’ 체제가 그 통합의 기치로 내붙여졌다. 홍콩 반환에 관한 여러 이미지들은 텔레비전 전파를 통해 홍콩과 중국 가정 곳곳에 전달되었으며 다중에게 공동의 기억으로 남았다. 결국 이미지다. 물론 홍콩 반환 이후 실제로 홍콩인들의 소란스러운 하루하루의 삶의 양식도 분명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인 측면 - 일국양제 하에서 홍콩의 자본주의적 뼈대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약속되었다 - 과 더불어 미디어와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숱한 홍콩영화들 속에서, 희망과 불안이 팽팽하게 힘을 겨루는 모습들을 우리는 보아 왔다. 식민과 탈식민 상태가 교차되는 상황 속에서 1997년 전후의 홍콩 영화들은 어떻게 당시를 이미지화하였고 (우리에게 현재인) 미래의 이미지들을 그려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홍콩의 영화산업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첫 번째 황금기를 맞이하고, 1990년대 초반에 두 번째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1997년 전후로 홍콩경제가 흔들리자 영화산업도 그러했고 많은 홍콩영화인들이 이민을 선택했다. 홍콩영화는 그렇게 차츰차츰 쇠퇴해갔다. 1993년에 홍콩에서 제작된 영화는 187편이었지만 1997년에는 86편으로 감소했다. 말하자면 1997년 전후의 홍콩영화들은 과거의 호황을 추억하며 사그라질 것만 같은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양쪽을 향해 모두 시선을 던지고 있는 영화들이었다.

 

2046년이면 ‘홍콩특별행정구’ 상태도 끝난다. 현재 홍콩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산혁명은 1997년과 2046년 사이에 있었던 아주 큰, 다시 다중의 뇌리에 각인될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다시 과거로 돌아가 1997년을 기점으로 전후 홍콩영화에서 재현된 불안하고 부유하는 이미지들을 톺아보고자 한다.  

[Credit]

 

자료수집  및 아이디어

배동미, 진성문, 고  은, 유웅조, 고지연

 

편집

노수민

 

사용한 영화

<영웅본색 A Better Tomorrow>(dir. 오우삼 John Woo, 1986)

<영웅본색 2 A Better Tomorrow II>(dir. 오우삼 John Woo, 1987)

<아비정전 Days of Being Wild>(dir. 왕가위 Wong Kar Wai, 1990)

<종횡사해 Once a Thief>(dir. 오우삼 John Woo, 1991)

<시티 보이즈 Arrest the Restless>(dir. 유국창 Lau Kwok Cheong, 1992)

<금지옥엽 He's a Woman, She's a Man>(dir. 진가신 Peter Chan, 1994)

<유성어 The Kid>(dir. 장지량 Cheung Chi Leung, 1999)

<이도공간 Inner Senses>(dir. 나지량 Law Chi Leung, 2002)

 

© 2014 by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the Arts. Trans-screen workshop 3

bottom of page